메뉴 건너뛰기

나눔날짜 2018-07-21 

삿 9: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사사기의 시작부터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9장의 심판 사건도 공의가 주제입니다. 아비멜렉의 형제학살 와중에 요담이 살아남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착각은 그가 살았고 그가 가시나무 우화를 말하고 있으니까 요담이 정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담은 아비멜렉의 죄를 지적하는 일만 합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물론 요담의 입장에서 자신은 정의 그자체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미디안의 손에서 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형제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 나라 백성가운데 도움을 주는 이가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기드온의 업적을 잊어버리고 원수같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요담에 입장에서는 하나님도 원망스럽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치가 떨릴 것입니다.

요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입니다. 그러나 그도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교제 한적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도 권력을 탐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사람 중 한명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기드온이나 아비멜렉이나 이스라엘이나 요담 자신도 똑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본문이 보여줍니다.

 

그러나 본인은 울분을 가지고 사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담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까?

똑같이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면서 상대방의 신앙인답지 않은 삶만을 비판함으로 자신은 정의롭다고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인것과 그 때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그걸 보여 주는 겁니다.

 

요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입니다. 이름은 그럴듯하게 지어 놓았지만 그의 삶은 그 이름에 걸맞은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의 이름은 모두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이름에 걸맞는 교육이 없었기에 그도 하나님의 희망으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판은 정확하게 하지만 근본적인 대안이나 문제의 해결방법은 모른다는 것을 요담의 우화를 통해 보여 줍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요담 같지 않습니까?

교회와 세상을 향한 분노는 가득하지만 실은 나 자신 조차 하나님을 모르기에 무엇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인지를 모른체 비판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아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리야 합니다.